잠,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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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오랜동안 소설을 쓰지 못하다가 토해내듯이 썼다는 소설 ‘잠’. 이후 다시 한번 소설가로서 궤도에 오르게 한 작품이어서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100페이지도 않되는 소설에, 두꺼운 종이, 거기에 중간중간 일러스트로 값이 무려 14천원 가까이 하는 문고본을 좋아하는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워낙 하루키 소설을 좋아했고, 도서정가제 시행전 세일하던 책이라 내용도 보지 않고 사버린 책이다.
단편소설답게, 약간 싱겁긴 하지만,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잘 캐치해는 하루키 특유의 필력은 잘 살아있다.

십며칠째 잠을 자지 못하여 잊고 지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해 가는 주인공 얘기를 써내려가며, 하루키도 다시 소설을 쓸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잊고 지낸게 참 많다. 한 때는 책에 푹 빠졌었고, 사진에 빠졌었고, 학생운동에 빠졌었다. 그 때 그 열정이 지금의 나에게 남아있기는 한 걸까, 그리고 그 때의 열정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언젠가 한번, 어딘가에 필요해서 그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연필을 손에 들고 종이를 마주하자 남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보면 안다. 머릿속에도 떠오른다. 하지만 막상 그림으로 그리려고 하면 그 전체상을 내가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것이다. 16

지금도 물론 우리는 흡족하다고 생각한다. 집안에는 문제거리가 될 만한 그늘이라고는 없다. 나는 남편을 좋아하고 신뢰한다. 그리고 그쪽도 그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세월과 함께 생활의 질은 조금씩 변해간다. 매사에 예전처럼 심플하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제약은 보다 복잡한 것이 되었다. 21

내가 마지막으로 책 한 권을 제대로 꼼꼼하게 읽어본 게 언제였을까. 그때 나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책의 제목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왜 이토록 급격히 변해버리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뭔가에 들씌운 것처럼 마구 책을 읽어대던 그 옛날의 나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 세월, 그리고 기이할 만큼 강했던 그 열정은 과연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까. 43

잠이 오지 않은 뒤로 내가 생각한 것은, 현실이란 참 얼마나 손쉬운가, 라는 것이었다. 현실을 감당하는 일 따위, 너무도 간단하다. 그것은 그저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집안일이고 그냥 성교이고 그냥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의 작동과 마찬가지여서 한 차례 운용하는 절차를 익혀버리면 그다음은 끝없는 반복일 뿐이다. 이쪽 버튼을 누르고 저쪽 레버를 당긴다. 눈금을 조절하여 뚜껑을 덮고 타이머를 맞춘다. 그냥 그것의 반복이다. 61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의 패턴을 만들어나가는 존재이고, 한번 만들어진 그런 경향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바뀌지 않는다. 즉 인간은 그러한 경향의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가는 셈이다. 그리고 잠이야말로 그렇게 한쪽으로 쏠린 경향을 – 구두 뒤축이 한쪽만 닳는 듯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 중화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잠 속에서 한쪽으로 쏠린 채 사용되던 근육을 자연스럽게 풀어주고, 한쪽으로 쏠린 채 사용되던 사고 회로를 진정시키고 또한 방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쿨다운된다. 잠은 인간이라는 시스템에 숙명적으로 프로그램화된 행위이며 누구도 그것을 패스할 수는 없다. 잠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존재 그 자체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 69